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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이발소 그림 앞에서.

by 성봉수 2023.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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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부 나간 곳.
 현장에 짐을 부리고 나자, 예보대로 비가 내린다.

 

때맞춰.

짐 부리니 비 오신다. 담배 먹으며 부고받았다.

sbs090607.tistory.com


 노부부가 지키고 있는 촌가.
 소반이 매달려 있는 부엌 한 면의 풍경에 시선이 멈춘다.


 이발소 그림.
 참 오랜만이다.
 1990년에 신축했다니 그때 집들이 선물로 받은 액자일 텐데,


 손 닿는 곳에 쓰여있던 보낸 이나 단체의 이름이 지워질 정도로 함께한 세월이 길다. 한량 같은 서방님 비위 맞추며 고단한 농사로 자식들 가르치고 짝지어 분가시킨 안주인의 애쓴 손길이 눈에 선하다.


 내 기억의 이발소 그림의 문구는 "가화만사성"이거나 "소문만복래"이거나 "일체유심조"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촌광음불가경"이나 "일소일소 일로일로" 따위가 정상적인 제발(題跋)이었는데, 한자 성어를 한글 격언(格言)으로 쉽게 풀어 쓴 변신이 필요하도록, 1990년대까지도 이런 유의 이발소 그림이 상품성이 있었나 보다.
 뭐라고 중얼거려 놓았는지 문구에 관해서는 관심 없었지만, 다닥다닥 젖을 물리고 누워있는 어미 돼지의 표정을 마주하며 어쨌건 마음이 푸근하다.


 \작업 시작 전, 굽은 허리로 커피잔을 들고 돌아다니던 쥔아주머니의 발걸음은 끓일 물이 없어 허사가 되었지만, 점심으로 중국 음식을 시켜주신다. 탕수육도 함께 시키셨다. 그렇지 않았으면 빗속에 식당을 찾아다녀 와야 했는데, 아직은 남아 있는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는 맘. 가히 천연기념물 같은 상황이다. 그뿐이 아니다. 일을 마치고는 "저녁을 함께 먹자"며 주인아저씨께서 지켜 서 계시다가 식당에 동행하며 뜻을 관철하셨다.

 \상 노가다야 지금도 참을 준다던데, 나 같은 잡부에게는 남의 이야기일뿐더러 내 청춘 시절에는 품파는 이에게는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당연하게 주던 "장갑과 담배"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물론 이런 현상이 어느 특정 직종이나 현장에서만 보이는 단편적 왜곡은 아니다. 일례로, 예전엔 초상집 호상(護喪)을 보려면, 함께 밤을 새우는 문상객들을 위해 우선 담배부터 몇 보루 구비해 놓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출상 후 장지로 함께 향하는 사람 중에서 운구나 상여를 메는 이들에게는 운동화와 수건과 장갑을, 그렇지 않은 이들은 너나없이 수건 한 장은 받아 들었다. 요즘이야 매장 장례가 귀한 데다가 설령 매장으로 고인을 모신다고 해도 유교적 가풍이 남아 있는 경상도 어디 산골의 종가 정도가 아니라면 예전의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는 시절이다.  참도 장갑도 담배도 사라진 지금, 인구감소와 생활 수준의 상향으로 단순노동 직종에서는 인력 확보에 애를 먹는다는데, 어디를 가도 젊고 힘 좋은 외노자들이 버글거리는 것은 "선순환"과 "악순환" 중 무엇으로 이해해야 할까?


 한우설렁탕을 마주하고 시작된 아저씨의 무용담.
 ↘ 해병 청룡부대원으로 월남 다낭 산꼭대기에 파병 다녀온 술 담배 모르던 청년의 이야기.
 ↘ 그 당시에는 귀하던 125㏄ 오토바이를 타고 동해, 남해, 서해로 전국 일주한 이야기.
 ↘ 충청도에서부터 이틀을 경운기를 몰고 온 본인을 보고, 강원도 고한의 탄광 수위가 포복절도하던 이야기.
 ↘ 짝사랑하던 교장 딸을 친한 친구가 채갔고, 염병할 놈은 그 후에 죽었고, 내게 시집왔으면 지금도 잘살고 있을 테고, 이 모든 게 팔자고 운명이라는 이야기.
 ↘ 이야기...
 갈피 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80여 성상의 소재도 주제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야,
 거실에 놓인 2008년 장남 대학 졸업식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 "아니, 진짜 아저씨 아주머님이 맞아요? 아주머님도 그렇지만, 아저씨 젊어 인물이 어쩌면 이렇게 훌륭하셔요?"라고 묻는 내게,
 "아이고, 지금 같으면 오도 안했슈! 젊어서는 포마드 발러 머리 넘기구 인물 좋았쥬. 평생 일은 안 하구 싸돌아댕기기만 했슈!"라던 아주머님의 말씀이 이해되었다./

 \"철물점 닫기 전에 니쁠 사 가야 하는데..."
 식당 밖의 비는 잦아들 줄 모르고 창은 점점 거울이 되어가는데, 뚝배기에서 달그락 소리 멈추고 십여 분이 지나도록 자리를 못 뜨고 있다. 아저씨의 무용담에 가끔 추임새를 넣으며 급할 것 없는 오야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속이 탄다.
 "먼저덜 일어서. 내가 원래 뜨거운 걸 잘잘 못 먹어. 친구들이랑 밥을 먹어도 내가내가 하도 늦으니 마지막 수저를 꼽아 놓고 나 다 먹을 때까지 먹지 않고 지둘른다니께"
 마음 급한 내 초조함이 눈동자라도 흔들리게 했을까? 먼저 뜨기 시작한 설렁탕 밥알을 세고 있던 아저씨께서 풀어 놓던 인생 여정의 실타래를 잠시 멈춘다.
 
 그러고 보니 수저를 뜨는 아저씨 손이 많이 떨린다. 트럭 앞좌석, 가운데 보조 의자를 펼치고 앉아 식당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그랬다. 같은 낱말을 연이어 구사하는 어눌한 말투도 그렇고...


 \토실토실 살찐 새끼 돼지들이 모두 떠난 빈 울간.

 그 시간의 액자 속, 늙고 병든 돼지의 허무한 모습이 내일처럼 자꾸 어른거린다.

 

 20231211월
 단니쁠(스뎅/1) 테프론(3)


 -by. ⓒ 성봉수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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