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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성향.

by 성봉수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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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굴러다니는 책들이 또 늘어난다. 여지 것처럼 날 잡아 버려야 해결될 일이다.
 얼마 전 청탁 받은 글 자료 찾느라 책꽂이에서 꺼내 놓은 책들도 서재로 하나인데, 이것들도 제 자리 찾아 꽂아둬야 하고...
 담배를 물고 물끄러미 책꽂이를 바라보다가, 묵은 전집류들에 시선이 멈췄다.
 '곰팡내 폴폴 나는 저 책장들을 다시 넘기는 일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인 것 같은데, 자리도 모자라니 이참에 다 버려야 하나? 뭔 놈의 책 욕심은 이리 많은지...'

 아이들이 어릴 때, 백과사전 전집을 가까이 두고 읽어주기를 바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쪽에 쪽을 꼬리 물고 책장을 넘기며 지적 체험을 경험했던 내 어린 시절. 그 황홀하고 신났던 경험을 우리 아이들이 함께 맛보기를 원했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를 사는 세대에게는 능률 없는 무의미한 체험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기대를 접어버렸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는 "때"를 생각하면 늘 아쉬운 마음이다.
 어린 내가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눈물 콧물 훌쩍이며 듣던 훈계의 단골 주제였던 "때"
 "모든 일에는 때가 있어서, 니가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 하느니..."
 천만번 옳은 말씀이었지만, 빡빡머리 어린 내게 그 말씀보다 직접적으로 와닿은 것은 말씀하시던 아버지 손등에 불쑥불쑥 돋았던 푸른 핏줄. 그때는 그랬는데... 눈이 침침해질 무렵부터, 다른 것은 몰라도 '독서의 때'만큼은 절절하게 와 닿았다. 물론, 책을 읽는다는 게 특정 시간과 장소가 전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효율적인 측면에서는 "때"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노안으로 인한 가독력의 저하와 한 쪽을 넘기면 넘긴 쪽의 내용이 금세 가물가물해지는 기억력이나 집중력의 감퇴가 "독서의 때"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주기도 하지만, 내 개인적 경험으로 따지자면 어릴 적 책을 통해 간접 경험했던 어떤 것도, 살면서 도움 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데에 있다. 호랑이 담배 먹던 구전 동화에서부터 위인전과 고전 문학에서 현대 소설과 신변잡기 수필까지. 어릴 적 그 백지장 같던 머릿속에 담겼던 지적 체험들이 모든 관계의 처신이나 가부를 결정해야 할 상황마다, 암기해 놓은 구구단처럼 기본 틀로 작동했던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여가에는 언제나 컴 온라인 게임에 매진 중인 아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이젠 야근이 일상이 된 직장생활. 그러니 이미 책에 몰입할 수 있는 절대적일 때는 놓쳐버린 줄도 모르겠다. 요즘 세대야 온라인 게임을 통해 사람을 만나 친교도 쌓고 그 안에서 듣고 배우며 독서를 대신한 경험을 하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 아쉬운 마음은 떨쳐지지가 않는다.
 적어도 전집으로 제대로 된 <삼국지> 정도는 읽어줬으면 했다. 어쩌면 삼국지야 단행본이나 만화를 통해 수박 겉핥기라도 읽었을 가능성이 있고. 무협지 같은 삼국지보다는 차라리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보다 사실적인 <대망> 정도는 읽어줬으면 했는데...

 내가 아들 나이 때는 집에 늘 친구들이 북적북적 들락거렸다. 밤새 기타를 치며 동네 떠나가라 노래를 불렀고, 이틀이 멀다고 숙취에 괙괙 거렸다. 눈팅이가 밤팅이가 된 적도 있고 만든 적도 있었다. 은팔찌 발찌 차고 파출소에 잡혀 있던 때도 있었고, 겨울 주취 노숙으로 죽었다 살아난 적도 있었다. 그런 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아들.
 이제껏 단 한 명도 친구를 데려온 적도 보여준 적도 없다. 학교 졸업하고, 취업해서 직장생활을 하다 군대 다녀와 바로 복직하고 진급도 하고 시계 쳇바퀴 같은 직장 생활을 착실하게 잘하고 있다. 어쩌다 엄마랑 두런두런 웃는 소리는 들려도 문밖으로 목소리 한번 새어 나온 적이 없다. 술은 분위기 맞출 만큼은 먹는 모양인데 표나지 않고 그 시절 나처럼 왈패 같지도 않고 조곤조곤  차분하다.
 아들에게 아버지 유전자는 열성이기는 해도, 나랑은 분명 성향이 매우 다르다. 성향이 다르니 보는 것도 보고자 하는 것도 다를 테고, 가고자 하는 길도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게다. 사람 열 번 바뀐다고 하고, 한편으로는 사람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어쨌건 지금까지의 모습은 그때의 나보다 나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다르니,
 책을 읽고 안 읽고를 따지는 내 생각이 어쩌면 고리타분하고 터무니없는 일이지 싶다.

 빛바랜 사진 같은 전집류들.
 책꽂이들 더 이상의 공간도 없고, <삼국지> <대망> <토지>를 새로 읽을 일은 없는 듯하고...
 우선 이 세 부류의 전집류들부터 정리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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