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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옷핀으로 입을 꿰매다.

by 성봉수 202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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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토요일.
 서재에 틀어박혀 꼼짝 않고  저녁이 다 되도록 종일 고전 음악을 들었다.
 듣다 보니, 요즘이야 관심사에 접근할 수 있는 여러 미디어가 발전했지만, 연주회장을 찾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어쩌다 클래식 전문 음악다방(파리만 날리다 주점으로 변한)을 찾는 거 외엔 KBS 제1FM을 듣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고등학교 입학 기념 선물로 어머님께서 사주신 "쉐이코" 카세트 라디오의 사이클 바를  KBS 제1FM에 맞춰 반창고로 봉인해 놓고 지내던 내 한때(프로그램 시간 편제상 소품 위주로 틀어주다 보니 나오는 음악이 그 음악이 그 음악이라서 두 달도 못 되어 봉인을 풀기는 했지만...), 그 빡빡머리 학창 시절도 생각나고...
 요즘은 KBS 제1FM도 최하 악장 하나는 온전하게 틀어주니 듣는 이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유튜브라는 막강한 미디어 앞에서야...

 그렇게 종일 틀어박혀 모처럼 영혼의 귀인이 된 몸을 끌고 바깥채 화장실에 가 소피 보고 건너오는데...
 '어? 이게 뭐여? 왜 내 발자국이 찍혔지?'

 처음엔 '발바닥 땀인가?' 생각했다가 손으로 쓰윽 훑어보니 정체불명의 가루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바깥창을 열어 놓은 안방을 들어가 보니...
 '하... 클랐다...'

 비질로는 택도 없고 청소기로도 빨리지 않고 일일이 다 손걸레가 가야 해결될 판인데, 열어 놓은 옷장 빈 옷걸이 위에서부터 바닥의 노트북이며 쓰고 버린 이쑤시개 위에까지!

 살림살이를 다 들어내야 할 판이니, 엄두가 안 나고 입에서는 연신 '하! 클랐네! 이거 어떡햐!' 소리만 터져 나온다.
 중놈, 생경한 독경소리에 기웃 찾아온 삼월이 언니 왈,
 "아니, 이리되도록 모르고 있었댜? 어쩐지, 아까 뭐가 하얗게 계속 올라가더라..."
 (헐... 그랬다면, 바지랑대가 휘도록 널어놓은 마당의 아줌마 빨래는 상관없는 모양이시군?)
 '어떡햐! 어떡햐!' 탄식만 뱉어내다가, 도대체 이 상황의 전후를 판단하러 얼마 전부터 리모델 하느라 건물 전체를 포장으로 두른 옆집을 향해 대문을 나섰다.

 '아이! XXX 새끼덜!'
 슬리퍼 신은 발등이 덮이도록 건물 내부 전체에 쌓여 있는 분진들. 그 위에 버려진 공업용 집진 마스크 두 개. 이 분진의 정체를 확인하러 고개를 올려보니 그라인더로 천장 샌딩 작업을 한 모양이다.
 볼 것 없이 외노자 두 명 사서 작업시켰을 테고,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집 쪽 창문 다 열어 놓고 선풍기 틀어 놓고 했을 테고...
 'XXX 놈들이 있어야 때려쥑이지!'
 바닥에 쌓아 놓은 자재나 공구가 젖거나 말거나, 건물 뒤편에서 양동이를 찾아 더는 날리지 않도록 일단 물바다를 만들어 놓고 건너왔는데, 아무리 봐도 치울 엄두가 안 난다. 차라리 불을 확 싸지르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어쩌랴 당장 비비고 잠 잘 자리도 없으니...
 일단 이불부터 시작해서 들어낼 수 있는 것은 다 들어내며 낑낑거리다 보니 자정이 지났다.

 그렇게 일요일 지나 월요일까지. 꼬박 사흘을 생고생했다.

 월요일 퇴근한 삼월이 언니께서 '콩' 뛰어오시며 "어떻게 됐어유? 뭐래유?"
 '안 갔어. 지금 아직도 속에 용암이 부글거리는데, 갔을 때 삐딱한 말 한마디라도 돌아오면 내 승질에 가만있것어? 일 저지르기 싫어서 안 갔어'
 "그류, 잘 생각했슈!"

 컴퓨터 잠금 화면.
 지장보살 탱화만 있던 것에, 석가모니불 두 분을 더 모셔서 열어 놓고 죙일 불경을 틀고 있었다는 것을 뉘가 알 일이랴.

 옷걸이부터 시작해서, 빨아 널었던 것을 말려 다 개켜 치우고 팔자 없이 시달린 몸을 위해 잔꾀를 부려 이웃 문방구에 들러 옷핀을 사서 나서는데,
 "아니, 뭐 하시는데 옷핀을 이리 많이 사세요?"
 '녜... 바느질하기 귀찮아서요.'
 "아이고, 마느님 한테 해달라고 하셔요. 호호호~"
 더는 대꾸 없이 내 입을 옷핀을 꿰매고 돌아서며 생각한다.

 '아줌니,
 지금 내 서재에 부처님 두 분과 지장보살께서 열심히 불경을 읊고 계신 까닭을 모르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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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92803수
 이불 널러 올라간 옥상, 온통 분진으로 난리다.
 번뜩 든 생각,
 "독 뚜껑들 열어뒀으면 어쩔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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